2012년 7월 26일 목요일

" 서오릉 " 장흥면 고양시 경기도 Korea

서오릉에 대해 조선시대의 왕들과 왕비들의 얽힌
역사를 안내원으로 부터 들으며 공부하였습니다.

< 순창원 > 
산자와 죽은자의 세상을 구분하는 것으로서 홍살
문의 안쪽은 죽은 사람들의 세상이며, 홍살문의 바
깥쪽은 산 사람들의 세상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홍살문 뒤쪽에는 조선 제13대 명종의 맏아들 순회
세자와 공희빈 윤씨의 묘소입니다.

< 경릉 >
덕종 대왕과 왕비 소혜왕후의 릉에 대애 설명하고
있습니다.덕종은 수양대군의 맏아들로서 세자에
책봉되지만, 병으로 20세의 나이로 죽게됩니다.일
반적으로 왕릉은 왕의 것이 오른쪽에, 왕비의 것이
왼쪽에 저성 되지만 이것은 반대로 왕릉이 왼쪽에,
왕비의 릉이 오른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 경릉 >
여기서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서 보아 홍살문의
오른쪽에 덕종의 묘가 있으며, 왼쪽에 소혜왕후
의 묘가 있습니다.
< 덕종의 묘 >
세조의 맏아들이지만 20세에 돌아가심으로 그
의 아들 성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덕종으로 추존
합니다.
< 소혜왕후의 묘 >
월산대군과 성종을 낳았으며 68세에 죽습니다.
게을러서 올라가기 싫어서... 묘는 안 보입니다.

< 대빈묘 >
조선 19대 숙종의 후궁인 희빈 장씨의 묘입니다.

< 익릉 >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 김씨의묘.
홍살문에 가려서 묘는 보이지 않습니다.

< 수경원 >
조선 21대 영조의 후궁인 사도 세자를 낳은
영빈 이씨의 묘.
저기 안쪽에 들어가면 묘가 있답니다.묘는 모두
가 비슷비슷한 것 같았습니다. 지쳐서 그만.......

서오릉은 산책할 수 있도록 삼림길을 만들어 놓
았습니다. 서어 나무와 소나무와 단풍나무 길로
5km 정도이며 2시간 이상 소요 됩니다.

2012년 7월 23일 월요일

" 카돌릭 순교 성지" 양화진, 합정동 Seoul, Korea

이 땅은 순교자들의 얼이 깃든 '거룩한 땅 '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1800년대 조선 시대 종교의 자
유가 박탈당하고 국가 정세가 어지러울 암흑의
시기에 정치적 희생양이 되어버린 분들의 얼과
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절두산 순교 성지는 한국 천주 교회를 대표하는 순교
사적지로 1866년 병인 박해 당시 많은 천주교 신자들
이 이 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병인 박해로 9명의 프
랑스 선교사들이 순교하자 이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
며 프랑스 함대가 1866년 9월과 10월에 조선을 침범하
였습니다. 조선 정부는 프랑스 함대와의 교전 후 천주
교 신자들을 이곳에서 처형했습니다. 그로 인해 수많은
유명, 무명 인사들이 처형된 양화진은 순교자들의 목
이 베어진 곳이라 하여 신자들 사이에 ' 절두산 '이라
불리게 됩니다. 원 지명은 '가을두', '용두봉', '잠두봉'
이라 불렀으며, 한강변 최고의 절경으로 유명했다고
합니다.안타깝게도 이 곳에서 순교한 것으로 기록상
확인된 신자수는 29명(무명 5명 포함)이라고 합니다.

한국 카돌릭 순교 성지 박물관 별관입니다.여기에는
형구, 형틀 체험관, 노 기남 대주교에 관한 물품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방문했던 날은 천주교 신자의 장례
식이 있는 듯 했습니다.

' 영원한 향기 '라는 꽃말을 가진 향나무입니다. 성
지 안에는 여러가지 나무와 꽃들로 넘쳐났습니다.

'도라지'입니다.

' 무궁화 ' 우리 나라 꽃입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성하 >
지난 1984년 한국 천주교 200주년 창설 기념 행사
참석차 한국에 온 교황 바오로 2세가 공항에서 곧
바로 직행해 참배 했던 곳이 이 곳 절두산 순교 성
지입니다. 이를 기념해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한국
방문 기념 흉상을 세웠습니다.
절두산에서 처형된 첫 순교자 가족입니다.
1972년 최 종태 교수가 제작한 것으로 프란
체스코(이 의송)가 그의 처 마리아(김 예쁜),
아들 봉익을 형상화한 듯한 이 순교자 상은
참수되어 떨어진 목을 몸통 위에 받쳐놓은
모습으로 처절한 순교 광경을 연상시킵니다.

김 대건 신부의 동상입니다. 이 동상은 김대건 신부
탄생 150 주년을 맞아 기념 제작한 것으로 애국 선열
조상 건립 위원회가 건립한 것이며, 홍익대 모 교수가
제작한 것으로 1972년 김 수환 추기경의 축성과 함께
제막 되었습니다. 순교 당시 그의 나이 25세였습니다.

한국의 첫번 째 사제 성 김대건 안드레아를
자세히 소개하고 있습니다.

김 대건 신부의 좌상

왼쪽의 건물이 절두산 천주교 성지 박물관입니다.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이 곳은 그야말로
한국 천주교 박해의 모든 것을 볼 수 있는 공간입니
다.절두산 순교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의 발자취를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꾸며 놓았습니다. 병인년 천주
교 박해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흥선 대원
군과 천주교와의 관계, 한국 천주 교회 관련 자료와
유물, 김대건 신부에서 부터 김 수환 추기경의 흔적
까지 만나볼 수 있습니다.

2012년 7월 18일 수요일

"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서 ", 합정동 Seoul Korea

<양화진 선교사 묘원 기념관>
2, 3층은 외국인 연합 예배 처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100주년 기념으로 세운 것입니다.100주년 기념 교
회에서 양화진 선교사 묘원을 관리하고 무료로 묘비
에 대한 설명을  친절하게 설명도 해 줍니다.이 날은
장마철인지라 빗방울이 후둑 후둑 떨어져서 찍은 사
진들이 어둡게 보입니다.

양화진 선교사 기념관을 세운 후 하나님께 봉헌
하면서 지은 글 귀입니다.

100여 년 전 조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낯선 이국 땅에서
자신의 일생을 바친 선교사님들의 귀한 복된 삶,그들이 무엇이
아쉬워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복음의 열정과 주님에 대한 사
랑의 확증이 그들 자신을 자원 제물로 바쳤기에 그리도인이라면
존경과 감사를 잊지 말아야할 것을 마음에 새겨봅니다.또한 100
여년 전 지금의 아프리카 오지 보다도 못한 이곳에 부모를 따라 채
꽃을 피워 보지 못하고 하늘 나라에 간 천사들을 보면서 마음이 찡
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기도 드립니다.

영국의 언론이었던 베델은 '대한 매일 신문보' 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통해서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
려는 일본제국주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으
서 언론을 통해 억눌린 한국인을 대변 했습니다.

 
헐버트는 한국의 은인, 한국 사람 보다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 받는 일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23세 때 육영 고원 영어 교사로 내한 합
니다.육영 공원의 운영과 교육내용 방법에 관한 규정을
제정한 헐버트는 세계 지리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한국
학생들에게 '사민 필지'를 한글 판으로 발행해서 필수 교
재로 사용 하기도 합니다.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문서 선교를 하면서 YMCA의 초
대 회장을 맡습니다.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독립을 위해
서 힘썼으며, 헤이그에서 한국의 독립의 정당을성을 호
소 했으며, 광복 후 이 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내한 했지
만 노쇠해서 여독을 견디지 못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헐버트가 " 나는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 한다"
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캠벨 선교사는 여성입니다. 27세 때 남편과 사별 하고
두 자녀도 병으로 잃게 됩니다.1897년 44세 나이로 한
국에 들어와 '배화 학당'을 세우고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하면서 '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 '이라는 뜻으로 '배화 학당' 을 만듭니
다.그리고 예배당을 건립 하면서 종침교 근처에서 지금
의 '종교 교회'(최 이우 목사, 나의 질녀 황분득이의 남편)
와 자하교 근처 에서 자교 교회를 세웠습니다.국적은
미국 텍사스 주에서 1853년에 태어 나서 1920년에 67세
의 나이로 우리 나라에서 소천 하셨습니다. 

<로버트 하디 선교사>
캐나다 출신으로 1898년 함경 남도 원산을 거점으로
강원도 북부에서 의술을 베풀며 전도를 시작 했습니다.
특히 1906년 8월 평양에서 그가 인도 했던 감리교 장로
교 선교사 연합 기도회는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기폭제
가 됐습니다. 1935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가서 세상을 떠
났으나 그가 한국에서 선교할 당시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두 딸이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채핀 부부 선교사>
채핀 선교사 부부는 일생을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헌신 했으며,특히 아내 안나 선교사는 여성 신학교와 농
촌 여성 지도자 양성에 크게 기여 했습니다.남편 빅터 채
핀 선교사는 언드우드 선교사를 도와 경기도 지역에서 선
교 활동 했으나 내한 3년 만에 과로로 사망해 양화진에 안
장 되었습니다. 안나 채핀은 남편 사망 이후 1920년 미 남
북 감리교단이 연합하여 설립한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
의 초대 교장과 협성 신학교의 초대 부교장을 역임 하게 됩
니다. 일제의 추방에 의해 한국을 떠났던 안나는 광복 이후
다시 한국에 와 이화여대 교수, 감리교 신학대 명예 교수,
이화 학원 이사장으로 봉직 했습니다.

미국 콜롬비아대를  졸업한 베어는 감리교 선교사로
일생을 여성 계몽과 능력 계발 사업에 헌신한 여성 선교
사 입니다.언니인 채핀 선교사 부부의 영향을 받아 1913
년 내한 했습니다.'태화 여자 사회관' 관장으로 일 했으며
천안 등지에서 지역 여성 사업에 헌신 했습니다. 1938년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식하고 있습니다

벙크 선교사는 한국 이름으로는 '방거'입니다.
배재학당을 통해 교육과 선교에 헌신하신 선교사.

저런!!  사진이 누웠네요.ㅉㅉㅉ
무어는 '백정 전도의 개척자'이자 '백정 해방 운동의
조력자'로 알려져 있습니다.1860년 미국에서 태어나
신학교를 졸업 후 언드우드에 의해 32세 때 선교사로
한국에 옵니다. 꾸준한 노방 전도를 통해 곤당골에 교
회를 세우고 백정들도 참여케 합니다.당시 양반들은 백
정들과 한자리에 앉을 수 없다 하여 양반 자리를 따로 마
련해 달라고 했으나 무어가 거절하자 교회가 갈라 집니
다. 3년 후에 다시 합치면서 '중앙교회'라는 이름으로 거
듭나게 됩니다.이 후 1905년 예배당을 승동으로 옮겨
이름도 '승동 교회'가 됩니다.차별 없는 복음을 전하던
무어는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 46세의 나이로 제중원
에서 숨을 거둡니다.

윌리엄 홀 은 캐나다 의사로서 의사인 로제타를 만나
약혼 후 한국에 들어와 서울에서 혼인한 후 한살된 아들
을 데리고 평양에서 교회를 개척 하면서 윌리엄은 전염병
에 걸려 죽게 됩니다. 아내 로제트는 유복자인 딸 에디스를
낳게 되지만 이질로 죽게 됩니다. 로제타는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 병원'을 세웁니다. 김점동(박에스더)이라는
여성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의학공부를 시켜 우리 나라 최초
여성 의사를 만듭니다.로제타는 한글 맞춤법에 맞는 점자법도
개발해서 시각 장애 학교도 세우고 여성 의사와 간호사를 양
성 하게 됩니다. 아들 셔우드 홀 (의사)과 며느리 메리언(의사)
은 한국에서 16년간 선교 하면서 폐결핵 퇴치를 위해 '크리스마
스 씰'을 만들어 결핵 환자들 을 돕습니다. 그 후 미국 선교 본부
로 부터 인도에 의료 선교 가라는 명령을 받고 인도에서 1963년
까지 결핵 퇴치 운동을 벌입니다.

< 엘리스 선교사 >
1886년 24세의 처녀로 조선 땅에 와서 일생을 바치고
'정신여고' 를 세워 훌륭한 여성 교육의 명문 학교를
남겨 놓았습니다.

27세의 나이로 1885년 부화절, 아펜젤러 목사는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배재학당'을 세우고 '정동
감리 교회'를 세웁니다. 출판 분야에도 공헌해서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 위원회를 조직해서 영어로 된 성경을 한
글로 번역 하였으며,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
위원회에 참석키 위해 가던 중 배가 침몰하여 44세의 나
이로 순직 하셨습니다.그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평생 교육 선교사로 헌신 하면서 아들 아펜젤러 2세는
배재 학당 교장과 이사장직을 했으며, 딸 엘리스 리베카
아펜젤러도 이화학당장을 맡아 '이화 여자 전문학교'로
승격 시키고 초대 교장이 되었습니다. 아래의 사진 2개도
참고 하십시오.


원두우
원두우 목사의 일가는 " 한국 선교의 개척자 3대에 걸쳐
조선 기독교 대학 (연세대학교)에서 헌신하신 선교사입
니다.1885년 부활절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와 당시
기독교 전파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지금북한 지방에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 합니다.미국에 있는 후배 선교사 에비슨, 무어, 레이
놀즈, 리, 데이트....... 한국으로 데려 오기도 합니다. 성경
번역과 사전도 출판 하였으며,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조
선 기독 대학 (나중에 연세대학이됨)도 설립해서 초대 학
장도 지냅니다.언드우드 2세(원 일한)는 아버지를 이어 조
선 기독 대학의 3대 교장으로서 학교 발전에 공헌했고 언
드우드 3세도 연세 대학의 교수와 이사로 봉직 하였습니다.

언드우드 일가 묘역

미국 북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쇼는 콜롬비아 대학원에
서 수학한 후 1921년 한국 선교사로 평양에 부임 하게 됩
니다.그는 북 감리교 평양 스테이션에서 운영했던 광성고
등 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그 후 평북 영변과 황해
도 해주에서 전도 및 교육 사업을 위해 일합니다. Moore선
교사와 함께 평양 요한학교를 창설 운영 합니다. 대전에 교
역자 수양 시설인 '목자관'을 창설 합니다.한국 전쟁 때는 미
군 군목으로 입대 합니다.미군 해병 대위였던 그의 아들은
한국전 참전중 1950년 9월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 했습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는 395명의 위대하신 분들이 누
워 안식학고 있습니다.단연 미국이 235명으로 가장 많
았으며, 그외도 러시아, 영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스
페인, 벨기에, 덴마크.....순이 었으며, 부모를 따라 낯선
땅에 와서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어린이가 100여명 이
상 되어서 보는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2012년 6월 3일 일요일

'신세계 첼시 파주 프리미엄 아울렛' 파주 경기도 KR

경기도 파주에는 outlet이 롯데와 신세계 두개가 있습니다.
우리 일행은 신세계 첼시 프리미엄 outlet에서 쇼핑 하기로
하였습니다. 첫 느낌은 놀이 공원에 온 기분과 또한 미국
mall에 온 것 처럼 착각 했습니다. 모든 layout 이 미국 outlet
과 너무나 닮았습니다. 밝을 내다볼 수 없는 백화점과는 달리
탁 트인 공간에서 쇼핑할 수 있는 점, 그리고 익숙한 브랜드가
많은 것이 좋았습니다. 여주 프리미엄 아울렛은 해외 명품
브랜드 쇼핑 공간이라면 파주 프리미엄 아울렛은 명품과 함께
스포츠 웨어, 남성의류, 아동의류, 캐쥬얼, 슈즈, 생활 등......
한 곳에서 편하게 쇼핑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Directory 입니다. 신세계 첼시 outlet은 3층으로 되어 있고
매장들이 층마다 원으로 연결되어있는  동선이라 쭉 둘러
보면서 쇼핑하기에 편했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가족 단위로 쇼핑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주방 브랜드도 입점이 되어 있었습니다. 코렐, 헨켈,
테팔, 르크루제 등이 있었지만 시간이 없어 매장에
들러지는 못했습니다.

이국적인 경치를 감상하면서 쇼핑을 즐길 수 있었습니다.

놀이 공원에 온 기분이예요.

Food Court 에 다양한 음식들이 있었지만 우리 일행은 이미
장어구이와 황복어 지리로 식사한 후라 배가 불러 왠만한
음식은  눈에 들어 오지 않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