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7월 18일 수요일

"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서 ", 합정동 Seoul Korea

<양화진 선교사 묘원 기념관>
2, 3층은 외국인 연합 예배 처소로 사용하고 있으며
100주년 기념으로 세운 것입니다.100주년 기념 교
회에서 양화진 선교사 묘원을 관리하고 무료로 묘비
에 대한 설명을  친절하게 설명도 해 줍니다.이 날은
장마철인지라 빗방울이 후둑 후둑 떨어져서 찍은 사
진들이 어둡게 보입니다.

양화진 선교사 기념관을 세운 후 하나님께 봉헌
하면서 지은 글 귀입니다.

100여 년 전 조선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려고 낯선 이국 땅에서
자신의 일생을 바친 선교사님들의 귀한 복된 삶,그들이 무엇이
아쉬워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복음의 열정과 주님에 대한 사
랑의 확증이 그들 자신을 자원 제물로 바쳤기에 그리도인이라면
존경과 감사를 잊지 말아야할 것을 마음에 새겨봅니다.또한 100
여년 전 지금의 아프리카 오지 보다도 못한 이곳에 부모를 따라 채
꽃을 피워 보지 못하고 하늘 나라에 간 천사들을 보면서 마음이 찡
했습니다.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평강이 넘치기를 기도 드립니다.

영국의 언론이었던 베델은 '대한 매일 신문보' 와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통해서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
려는 일본제국주의 정책을 신랄하게 비판한 사람으
서 언론을 통해 억눌린 한국인을 대변 했습니다.

 
헐버트는 한국의 은인, 한국 사람 보다 한국을 사랑한
외국인으로 칭송 받는 일을 했습니다. 미국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23세 때 육영 고원 영어 교사로 내한 합
니다.육영 공원의 운영과 교육내용 방법에 관한 규정을
제정한 헐버트는 세계 지리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한국
학생들에게 '사민 필지'를 한글 판으로 발행해서 필수 교
재로 사용 하기도 합니다.잠시 귀국했다가 다시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문서 선교를 하면서 YMCA의 초
대 회장을 맡습니다.고종의 외교 고문으로 독립을 위해
서 힘썼으며, 헤이그에서 한국의 독립의 정당을성을 호
소 했으며, 광복 후 이 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내한 했지
만 노쇠해서 여독을 견디지 못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헐버트가 " 나는 한국인 보다 한국을 더 사랑 한다"
는 글귀가 새겨져 있습니다.

캠벨 선교사는 여성입니다. 27세 때 남편과 사별 하고
두 자녀도 병으로 잃게 됩니다.1897년 44세 나이로 한
국에 들어와 '배화 학당'을 세우고 여성들을 대상으로
선교 활동을 하면서 ' 여성을 아름답게 기르고 꽃 피워
내는 배움의 터전 '이라는 뜻으로 '배화 학당' 을 만듭니
다.그리고 예배당을 건립 하면서 종침교 근처에서 지금
의 '종교 교회'(최 이우 목사, 나의 질녀 황분득이의 남편)
와 자하교 근처 에서 자교 교회를 세웠습니다.국적은
미국 텍사스 주에서 1853년에 태어 나서 1920년에 67세
의 나이로 우리 나라에서 소천 하셨습니다. 

<로버트 하디 선교사>
캐나다 출신으로 1898년 함경 남도 원산을 거점으로
강원도 북부에서 의술을 베풀며 전도를 시작 했습니다.
특히 1906년 8월 평양에서 그가 인도 했던 감리교 장로
교 선교사 연합 기도회는 1907년 평양 대 부흥의 기폭제
가 됐습니다. 1935년 은퇴하고 미국으로 가서 세상을 떠
났으나 그가 한국에서 선교할 당시 어린 나이에 목숨을
잃은 두 딸이 양화진에 묻혀 있습니다.

<채핀 부부 선교사>
채핀 선교사 부부는 일생을 한국 교회와 성도들을 위해
헌신 했으며,특히 아내 안나 선교사는 여성 신학교와 농
촌 여성 지도자 양성에 크게 기여 했습니다.남편 빅터 채
핀 선교사는 언드우드 선교사를 도와 경기도 지역에서 선
교 활동 했으나 내한 3년 만에 과로로 사망해 양화진에 안
장 되었습니다. 안나 채핀은 남편 사망 이후 1920년 미 남
북 감리교단이 연합하여 설립한 감리교 협성 여자 신학교
의 초대 교장과 협성 신학교의 초대 부교장을 역임 하게 됩
니다. 일제의 추방에 의해 한국을 떠났던 안나는 광복 이후
다시 한국에 와 이화여대 교수, 감리교 신학대 명예 교수,
이화 학원 이사장으로 봉직 했습니다.

미국 콜롬비아대를  졸업한 베어는 감리교 선교사로
일생을 여성 계몽과 능력 계발 사업에 헌신한 여성 선교
사 입니다.언니인 채핀 선교사 부부의 영향을 받아 1913
년 내한 했습니다.'태화 여자 사회관' 관장으로 일 했으며
천안 등지에서 지역 여성 사업에 헌신 했습니다. 1938년
세브란스 병원에서 사망하여 양화진에 안식하고 있습니다

벙크 선교사는 한국 이름으로는 '방거'입니다.
배재학당을 통해 교육과 선교에 헌신하신 선교사.

저런!!  사진이 누웠네요.ㅉㅉㅉ
무어는 '백정 전도의 개척자'이자 '백정 해방 운동의
조력자'로 알려져 있습니다.1860년 미국에서 태어나
신학교를 졸업 후 언드우드에 의해 32세 때 선교사로
한국에 옵니다. 꾸준한 노방 전도를 통해 곤당골에 교
회를 세우고 백정들도 참여케 합니다.당시 양반들은 백
정들과 한자리에 앉을 수 없다 하여 양반 자리를 따로 마
련해 달라고 했으나 무어가 거절하자 교회가 갈라 집니
다. 3년 후에 다시 합치면서 '중앙교회'라는 이름으로 거
듭나게 됩니다.이 후 1905년 예배당을 승동으로 옮겨
이름도 '승동 교회'가 됩니다.차별 없는 복음을 전하던
무어는 1906년 장티푸스에 걸려 46세의 나이로 제중원
에서 숨을 거둡니다.

윌리엄 홀 은 캐나다 의사로서 의사인 로제타를 만나
약혼 후 한국에 들어와 서울에서 혼인한 후 한살된 아들
을 데리고 평양에서 교회를 개척 하면서 윌리엄은 전염병
에 걸려 죽게 됩니다. 아내 로제트는 유복자인 딸 에디스를
낳게 되지만 이질로 죽게 됩니다. 로제타는 평양에 남편을
기념하는 '기홀 병원'을 세웁니다. 김점동(박에스더)이라는
여성을 미국으로 데리고 가서 의학공부를 시켜 우리 나라 최초
여성 의사를 만듭니다.로제타는 한글 맞춤법에 맞는 점자법도
개발해서 시각 장애 학교도 세우고 여성 의사와 간호사를 양
성 하게 됩니다. 아들 셔우드 홀 (의사)과 며느리 메리언(의사)
은 한국에서 16년간 선교 하면서 폐결핵 퇴치를 위해 '크리스마
스 씰'을 만들어 결핵 환자들 을 돕습니다. 그 후 미국 선교 본부
로 부터 인도에 의료 선교 가라는 명령을 받고 인도에서 1963년
까지 결핵 퇴치 운동을 벌입니다.

< 엘리스 선교사 >
1886년 24세의 처녀로 조선 땅에 와서 일생을 바치고
'정신여고' 를 세워 훌륭한 여성 교육의 명문 학교를
남겨 놓았습니다.

27세의 나이로 1885년 부화절, 아펜젤러 목사는 최초의
감리교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배재학당'을 세우고 '정동
감리 교회'를 세웁니다. 출판 분야에도 공헌해서 최초의
한글 성경 번역 위원회를 조직해서 영어로 된 성경을 한
글로 번역 하였으며, 1902년 목포에서 열리는 성경 번역
위원회에 참석키 위해 가던 중 배가 침몰하여 44세의 나
이로 순직 하셨습니다.그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일평생 교육 선교사로 헌신 하면서 아들 아펜젤러 2세는
배재 학당 교장과 이사장직을 했으며, 딸 엘리스 리베카
아펜젤러도 이화학당장을 맡아 '이화 여자 전문학교'로
승격 시키고 초대 교장이 되었습니다. 아래의 사진 2개도
참고 하십시오.


원두우
원두우 목사의 일가는 " 한국 선교의 개척자 3대에 걸쳐
조선 기독교 대학 (연세대학교)에서 헌신하신 선교사입
니다.1885년 부활절 26세의 나이로 한국에 들어와 당시
기독교 전파가 불법인 상황에서도 지금북한 지방에서
적극적인 선교 활동을 펴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 합니다.미국에 있는 후배 선교사 에비슨, 무어, 레이
놀즈, 리, 데이트....... 한국으로 데려 오기도 합니다. 성경
번역과 사전도 출판 하였으며, 새문안교회를 설립하고 조
선 기독 대학 (나중에 연세대학이됨)도 설립해서 초대 학
장도 지냅니다.언드우드 2세(원 일한)는 아버지를 이어 조
선 기독 대학의 3대 교장으로서 학교 발전에 공헌했고 언
드우드 3세도 연세 대학의 교수와 이사로 봉직 하였습니다.

언드우드 일가 묘역

미국 북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쇼는 콜롬비아 대학원에
서 수학한 후 1921년 한국 선교사로 평양에 부임 하게 됩
니다.그는 북 감리교 평양 스테이션에서 운영했던 광성고
등 보통학교에서 교사로 일합니다. 그 후 평북 영변과 황해
도 해주에서 전도 및 교육 사업을 위해 일합니다. Moore선
교사와 함께 평양 요한학교를 창설 운영 합니다. 대전에 교
역자 수양 시설인 '목자관'을 창설 합니다.한국 전쟁 때는 미
군 군목으로 입대 합니다.미군 해병 대위였던 그의 아들은
한국전 참전중 1950년 9월 녹번리 전투에서 전사 했습니다.

양화진 선교사 묘원에는 395명의 위대하신 분들이 누
워 안식학고 있습니다.단연 미국이 235명으로 가장 많
았으며, 그외도 러시아, 영국, 프랑스, 호주, 캐나다, 스
페인, 벨기에, 덴마크.....순이 었으며, 부모를 따라 낯선
땅에 와서 질병으로 목숨을 잃은 어린이가 100여명 이
상 되어서 보는이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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